De nuit en jour
2020. 10. 24 – 2021. 5.30
Fondation Cartier pour l'art contemporain, Paris
심은록 (리좀 - 심은록 미술연구소 소장, 동국대 겸임교수)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이하 ‘까르띠에’)에서 사라 제(Sarah Sze)의 전시(De nuit en jour)가 있었다. 덕분에, 코로나로 인해 여행할 수 없었던 파리지앵들은 재마법화(Re-enchantment)된 세계를 탐험하며 위안을 얻었다. 사라 제는 1969년 보스턴에서 출생, 예일대(1991)와 뉴욕 스쿨오브비주얼아트(2003)를 졸업했다. ‘천재들의 상’(genius grant)으로 불리는 맥아더 펠로우쉽(MacArthur Fellowship, 2003)을 수상하고, 컬럼비아 미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그는 베니스 비엔날레의 미국관 대표작가(2013)였으며, 휘트니, 베를린, 리옹 비엔날레 등에 참가하고, 시카고 미술관(1998), 보스턴, 런던, 까르띠에(1999), 뉴 모마(The New MoMA, 2019) 등의 미술관에서 전시를 했다.
까르띠에는 외벽과 내벽 모두 유리로 되어 있어 외부와 내부가 소통되는 열린 구조이기에, 경계를 허무는 사라 제의 작품과 잘 어울리는 최적의 공간이었다. 그는 이번에도 회화, 사진, 설치, 조각, 미디어 아트, 건축, 등의 가능한 모든 예술의 경계를 유감없이 해체했다. 건축가 장 누벨은 까르띠에의 건축특징이 경계를 허물며, “무엇이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는지, 어디에서 시작하고 끝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라고 말했는데, 사라 제의 작업도 같은 맥락이었기에, 이번 전시는 모차르트의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위한 2중주 KV 423, KV 424>처럼, 장 누벨 ‘건축’과 사라 제 ‘설치’의 완벽한 2중주였다.
사라 제의 작업에 대한 첫 인상은 작은 천구(天球)를 보는 듯 하다. 공중에 매달린 구 형태의 설치, 영상의 신비로운 색감과 이 빛에 반짝이는 수많은 오브제들, 그리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빛 때문이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면, 별들이 모여 있는 천구가 아니라, 사진 이미지들과, 주변의 소소하고 일상적인 오브제들의 ‘아상블라주’(assemblage)이다. 작가의 손가락 사진, 꿀이 쏟아지는 이미지, 곧 사라질 한 조각의 구름,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 등 작가는 수 백장의 이미지를 직접 그리거나 프린트하고, 이미지의 가장자리는 손으로 대충 찢은 듯 어느 하나도 고르지 않다. 그렇게 ‘완벽’이란 허물이 벗겨지고, 우연성과 어정쩡함이 초대된다. 이 뿐만 아니라, 면봉, 태운 나무, 물컵, 등 금방 부스러지거나 사라질 것 같은 일상의 오브제들, 혹은 오래전에 사라진 옛 기억들도 소환된다. 하물며, 까르띠에에서 사용하던 빗자루도 들어가 있다. 작가는 “환경미화원이 빗자루를 찾길래, 작품 안에 있다고 알려 줬다”며 미소 짖는다. 그의 작업에는 개인적 기억, 감각, 전시 장소의 빛과 공간은 물론, 외부에서 들어오는 소음, 우연성, “오브제의 삶”까지 시적(詩的)으로 배어들어간다. 소소하고 일상적인 것들이 모여서 빛을 받고, 그 리듬에 맞춰 춤추기 시작하고 마침내 생명을 얻고 별처럼 빛난다. 프로젝터에 비춰진 관람객의 그림자도 작품에 드리워지면서, 영상의 움직임에 따라 출렁이며 작품화 된다.
각각의 이미지와 오브제들은 그들이 있던 시공간과 함께 소환된다. 사라 제는 최근 콜라주(collage)에 대해 쓴 글 “하루보다 짧은”에서, “콜라주는 벽 달력, 일기 또는 해체된 일정표와 같다”고 썼다.1 해체된 시간, 오브제들 사이의 해체된 장소, ‘부재의 장소 no where’가 뒤집힌 “에레혼 Erewhon”의 세계가 전개된다. 그리고 이 세계는 관람객들에 의해 “언제나 새롭게 재창조되는 지금-여기 now-here”2 이다.
리차드 세라(Richard Serra)는 뉴요커 매거진에 “사라 제가 조각의 잠재력을 바꾸고 있다.”3고 말했는데, 그 바뀌고 있는 잠재력이 아상블라주의 요소들 사이(여백)에서 뿜어져 나온다. “뒤샹의 <샘>(1917)은 ‘미술’과 ‘개념’, ‘미술의 고상함’과 ‘일상의 저속함’, 등의 사상적 콜라주로 이질감을 야기했다. 미술의 존폐 위기에, 그는 헤겔이 말한 바로 그 ‘개념’을 미술에 콜라주함으로써, 근대미술의 종말을 앞당긴 동시에 현대미술의 다원성을 폭발시켰다.”4 반면에 유럽형 다다이스트들의 콜라주는 화면 위에 직접 시각적인 이질감을 대치시켰다. 현대미술은 자신의 ‘몸’에 정신분석학, 현상학, 구조인류학, 문학, 음악, 등을 콜라주하고, 반면에 고결하고 고상한 아우라를 시장에 내던지며 태어났다.
그런데, 사라 제는 콜라주의 3D인 아상블라주에 여백을 넣어 콜라주의 원래의 목적인 이질감 생성으로 인한 ‘부딪힘’과 ‘해체’가 아니라, 이질적인 것들의 ‘존중’과 ‘공존’을 가져왔다. 그는 다양한 이미지와 오브제를 배치할 때, 공간을 배려해서, 각각 독립적으로, 서로의 경계와 ‘이질감’을 보존할 수 있고, ‘타자성’을 유지하게 한다.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관계는 그 자체에 의해 타자성을 뉴트럴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유지한다. 타자로서의 타자는 우리가 되거나 우리의 것이 되는 오브제가 아니다. 반대로, 자신의 신비 속으로 들어간다.”5 콜라주를 구성하는 오브제들의 경계가 낯설고 이질적일수록, 그 만큼 판단은 에포케(epoche)되며, 관계성은 여백 안으로 들어가고, 빛(영상)을 입은 신비의 모습으로 다시 여백으로부터 나온다.
사라 제는 미국에서 제일 오래된 도시 중의 하나인 보스턴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뉴욕에서 살며 활동하는 전형적인 미국 ‘도시녀’이다. 그런데도, 이번 작업에서 현대화되고 디지털화된 산수화, 좀더 정확히는 조선 후기의 ‘나열식 책거리’(‘책가도’에서 서가를 없애고 책과 다양한 오브제들이 나열된 그림)가 연상되는 이러한 이해할 수 없는 느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필력이 있고 잘된 산수화나 책거리에는 여백이 있어도 오브제들이 서로의 인력(引力)으로 끌어당기는 듯 관계가 형성된다. 좀 더 뛰어나고 훌륭한 그림은 그 여백 안으로 관람객까지 끌어들여서 함께 유희한다. 사라 제의 콜라주 작업(2D)에는 이러한 느낌이 없었는데, 까르띠에의 설치 작업을 비롯한 아상블라주 작업(3D)에서는 종종 이러한 여백의 힘이 발산된다. 동아시아적 여백에 익숙하지 않은 서양 관람객들은, 리처드 세라가 말했듯이, ‘잠재력’이라고 할 수 있다. 여백의 울림이 가능한 것은 오브제 간의 ‘배치’와, 회화, 사진, 설치, 조각, 미디어 아트, 건축요소를 자유자재로 운용할 수 있는 역량이다. 사라 제와 유사해서가 아니라 반대이기에 떠오른 작가는, 2007년 이곳에서 전시를 한 이불(Lee Bul)이다. 사라 제는 현시대의 경향인 소소한 담론과 스키조프레니아(schizophrenia) 현상을 따르는 작가라면, 끊임없이 ‘저항’하는 이불은 역으로, 거대신화와 파라노이아 현상을 고집하는 외로운 길을 걷고있다. 삶과 예술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과 구조가 다르기 때문이다.
“코로나로 가속화된 4차산업혁명 이후의 <제2의 인간의 죽음>”6과 사물과의 관계를 고민한 듯한 사라 제는 다음의 문장으로 에세이 “하루보다 짧은”을 마친다. “나는, 컴퓨터가 계산할 수 없는 사람들의 자질인 불규칙성, 아노말리, 무작위성을 포함하는 모든 이상한 형태의 결정체를 구성하고자 노력한다. 설치된 사물들 사이의 여백(공간)에는 서로 다른 삶의 리듬이 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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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Sarah Sze,“Sarah Sze writes on a recent collage. Shorter Than the Day”,
출처: 가고시안 갤러리 홈페이지
2.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김상환 옮김, 민음사, 2012, p. 21.
3. 출처: 컬럼비아 매거진, 겨울호 2016-7, 재인용.
4. 심은록, 『힐링아트와트아링힐, 다시 카오스로부터... 』, 교육과학사 2021. p.127.
5. Emmanuel Levinas, Ethique et infini. Dialogues avec Philippe Nemo, Paris, Fayard, 1982, p.69-70.
6. 심은록, op.cit.p.62 et sqq.
7. Sarah Sze, op.c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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