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복기 (아트인컬처 대표, 경기대 교수)
조덕현 작품의 키워드는 ‘기억’이다. 그는 오래된 흑백사진을 캔버스나 장지에 옮기는 작업을 지속한다. 연필, 목탄, 콩테를 사용해 사진을 회화로 정교하게 ‘재생’하는 작업이다. 주로 인물 사진을 다루기에, 그 초상 앞에 서면 사진 같은 그림인지, 그림 같은 사진인지 짐짓 놀라게 된다. 이른바 ‘사진 회화’다.
사진의 주인공은 이제까지 우리의 기억에 살아남은 한국 근현대사 속의 인물이다. 초기의 <20세기 추억> 시리즈에서는 이름 모를 민초(民草)나 작가 자신의 가족을 그렸다. 21세기에 들어서는 작가가 캐스팅한 특정한 개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국민화가 박수근의 장녀 인숙, 최초의 패션 디자이너 노라 노, 재일한국인 출신으로 영국의 로더미어 자작 부인이 된 이정선, 비운의 첫 여성화가 나혜석, 나아가 자신과 같은 이름의 영화배우 조덕현을 분신(alter ego)으로…. 그는 이들 개인사의 파편에서 거대 서사의 물결에 휩쓸려 잊힌 기억의 여백으로 성큼 다가선다. 개인사의 배경에는 서세동점의 근대화 물결, 치욕의 일제강점, 광복과 좌우익의 이념 대립, 한국전쟁과 분단 고착화, 산업화와 민주화 등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역사, 그 시간의 강이 유유히 흐른다. 조덕현은 빛바랜 사진에서 기억의 회로를 찾아나선다. 개인에서 공동체로, 시대에서 역사로.
조덕현은 왜 굳이 흑백사진에서 작품을 시작하는가. 롤랑 바르트는 ‘죽음’이야말로 사진의 본성(eidos)이라 설파했다. 사진은 그 자체가 이미 존재했던 사실, 시제(時制)로는 과거의 사실이다. 사진의 ‘부재 증명’ 이란 바로 이런 사태를 가리킨다. 조덕현은 사진의 ‘과거’ 시제를 회화로 끌어와 ‘현재’ 시제로 바꾼다. ‘인화’라는 복제의 다중성을 ‘그리기’라는 수공의 유일성으로 전환하는 행위다. 그는 가장 기초적인 재료와 가장 전통적인 표현 방식을 고집한다. 이미지를 구현하는 그리기의 실존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그는 회화가 손의 예술임을 증명한다. 손은 몸이고, 몸은 곧 인간 정체성의 최종 근거다. 회화야말로 인간의 실존을 보증하는 섬세하고도 집요한 페티시즘의 증표 아닌가.
보라! 그의 ‘사진 회화’는 진짜 사진처럼 정교하다. 이 빼어난 묘사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이 화면의 피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연필의 부드러운 입자(흑연 가루)가 밑칠하지 않은 캔버스에 살아있는 세포 조직처럼 촘촘히 점착되어 있다. 그것은 필시 일순간 정지된 대상을 ‘그리는 신체 행위’로 반복 구축함으로써, 시계의 바늘을 현재로 돌리려는 의지이리라. ‘스톱 모션’에 내장된 사진 속 주인공의 삶을 불러내고 상상하는….
조덕현은 뛰어난 미술연출가다. 그의 작품은 ‘사진 회화’에서 출발했지만, 단 한 번도 회화 영역에 갇힌 적이 없다. 그는 ‘대수롭지 않은’ 재료 기법으로 실로 ‘대수로운’ 작품의 아우라를 만들어내는 놀라운 연출력을 보여주었다. 전시장은 언제나 무대 같은 상황이다. 어둑한 그림자가 드리우고, 화려한 스포트라이트가 번쩍인다. 사진관이나 연극 무대, 아니면 영화 세트장 같은 분위기다. 아니면 사진의 원조인 ‘카메라 옵스큐라(어두운 방)’의 느낌이랄까? 자신의 회화를 다른 조형 요소와 어떤 방식으로 조합하든, 크기나 장소와 상관없이, 그는 기본적으로 ‘블랙박스’의 상황을 만들어낸다. 이 연출의 독창성이 빠진다면 작품은 그저 그런 구상 회화에 머물 것이다.
조덕현의 ‘사진 회화’는 입체, 설치, 사진, 영상, 텍스트, 사운드, 현장 프로젝트 작업과 유기적으로 연동했다. 가상의 매장과 발굴 작업도 마다하지 않는다. 또 리서치, 인터뷰, 구술 증언, 답사, 협업 등 컨템퍼러리아트 최전선의 제작 방법을 총동원한다. 한마디로 거대한 ‘기억의 아카이빙’이다. 모든 작업 과정과 방법은 오로지 역사의 블랙홀로 빠져버린 기억의 복원과 재구성, 그 생생한 리얼리티와 상상력의 발현에 쏠려 있다.
그리하여 조덕현의 일은 그저 그리는 것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하나의 사건이나 주제에 접근하는 사고와 행동의 반경이 가히 전방위로 열려 있다. 그는 민완 기자의 심층 취재처럼, 명탐정의 범인 추적처럼, 탐험가의 현지 작업(fieldwork)처럼, 고고학자의 발굴 작업처럼 주인공을 둘러싼 사실을 끈질기게 추적한다. 또 소설가의 플롯(plot)처럼, 영화감독의 연출처럼 이제는 갈 수 없는 과거를 현재로 바짝 소환하는 예술적 상상력을 십분 동원한다. 그 때문일까. 오늘날 사진을 재현하는 작가(게르하르트 리히터, 뤽 튀망 등)는 많고 많지만, 조덕현처럼 조밀한 기억의 그물망으로 짜낸 실존적 임팩트를 만나기 쉽지 않다.
오늘날의 세상은,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의 지적대로, ‘거대 서사’가 붕괴했다. 하나의 절대 원리나 진리가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는 지났다. 역사의 객관성은 상대적이며, 인류의 보편 기억이란 허구에 불과하다. 진정한 역사는 소서사의 기억의 총합이며, 그 흩어진 기억의 파편이 모이는 큰 바다이리라. 기억은 역사와 다르다. 기억은 항상 현재를 기점으로 활성화하는 현상이며, 영원한 현재의 체험으로 조정된다. 조덕현은 단순히 과거를 재현하는 ‘역사’가 아니라 현재를 투사하는 ‘기억’을 그린다. 그의 예술은 과거 역사의 리얼리티와 현재 기억의 주관성, 역사의 발굴과 기억의 재구성. 바로 이 양 축의 긴장을 절묘하게 파고든다. 따라서 그는 실재와 가상의 경계를 간단없이 넘나든다.
조덕현의 작품은 역사(지극히 개인사라 하더라도)에 하나의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의 망각을 흔들어 깨우고, 특유의 표상으로 기억의 새로운 가능성을 좇는다. 그리하여 그는 역사의 빛과 그림자가 드리운 ‘기억의 정원’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이 빛과 그림자에서 다시 낡은 흑백 ‘사진 회화’의 당위성이 오롯이 떠오른다. 흑백사진이란 컬러사진보다 정보량이 훨씬 적지만, 흑백에는 감춰진 정보를 보완하려는 인간의 갈망과 상상력이 개입할 여지가 있다. 이것이 흑백사진과 ‘사진 회화’의 매력이다. 그렇다. 저 희미한 기억의 풍경에는 굴절의 역사를 관통하는 좌절의 시린 추억이 서려 있고, 동시에 희망의 벅찬 꿈이 숨을 쉰다. 사진 속 주인공, 작가 조덕현, 그리고 관객이 시공을 초월해 한자리에서 만나는 환시. 기억, 그 기억의 기억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소용돌이친다.
조덕현은 최근 대형 인물 군상을 그려냈다. 기억의 수사학을 견지하되, 이미지의 수집 출처와 구성 방식이 변화했다. 인터넷 서핑으로 현실과 가상의 이미지를 합성하는 포토몽타주 기법을 끌어들이고 있다. 작품의 규모와 밀도가 실로 놀라운 대화면이다. 형식적으로는 서양미술에서 신화나 종교, 역사 등에서 주제를 취해 군상을 배치하고 사상이나 이념을 표현하는 구상화(構想畵, composition)의 특성과 유사하다. 그동안 조덕현은 한 장면, 한 장면의 작품으로 기억을 병렬하는 연금술을 취했다면, 대작에서는 한 장면, 한 장면의 기억을 모두 한 화면에 폭발적으로 쏟아 붓는다. 여기에 개인과 서사, 실재와 허구,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이 혼재하는 이시동도(異時同圖)의 파노라마를 펼친다. 인류사를 움직인 대사건의 이미지가 인력과 척력으로 아우성치는 혼성의 바다다. 우리의 잠든 의식을 깨우는 묵시의 조형이 아닌가.
여기서, 물어야 한다. 과연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 진정한 역사화가 존재했던가. 오늘날 과연 역사화는 존재할 수 있는가. 바로, 지금, 우리는 장대한 역사화의 귀환을 목도한다. 조덕현이 기억의 연금술로 그려낸 ‘21세기 신(新)역사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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